[인문칼럼] 권력의 포로가 아닌 정의

최필열 자문위원

편집부 | 기사입력 2021/05/12 [12:53]

[인문칼럼] 권력의 포로가 아닌 정의

최필열 자문위원

편집부 | 입력 : 2021/05/12 [12:53]

 

 

정의란 인간의 산물이다. 그러나 권력의 포로는 아니다. 역사 속에서 권력은 히드라처럼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천국의 빛처럼 정의로 간주 되어 왔다. 때로는 안위만 보장되면 홉스의 리바이어던도 주저 없이 환영했다. 그리고 권력의 시효 속에서 지식인들의 패배주의와 냉소주의는 시대에 저항하는 소수의 불꽃마저 참잠시켜 버렸다.

 

인간은 자연의 힘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매우 나약한 존재이다. 그래서 우울하고 슬퍼지면 친구나 가족, 존엄과 평등이 그리워지면 민족과 국가에 의지했다. 그리고 수천 년 동안 인간의 권위는 신법에서 오는 것이고 우리의 자유보다 신의 말씀을 더 신성시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인간의 마음을 훔친 군주는 자신의 지위에 대한 공포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때문에 두 배로 잔인하고 위험해졌다. 따라서 유럽의 민족주의자는 지구상의 사악한 악마를 모두 처단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라고 선언했고 아메리카 드림의 평등사상은 인종차별과 근본주의 위계질서를 창조했다. 또 열강들의 제국주의가 창궐했으며 단일 국가는 정치 권력의 전술들을 주저 없이 사용했다. 이렇듯 삼라만상을 제압하는 거대한 야수적 권력 앞에서 지구촌의 정의는 피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삶이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모순으로 가득 찬 시대일수록 윤리 정치의 사유는 활짝 피어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정의를 갈망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총칼에 맞서고 누군가는 광장으로 뛰쳐나간다. 이에 고통과 회한의 아테네 민주정, 낡은 질서의 대명사 프랑스 혁명과 신분제 타파 조선의 동학혁명은 오늘날까지 위대한 공동의 기억을 품고 있다.

 

인간은 객관적인 인식 앞에서는 냉정하고 실천적 행위 앞에서는 머뭇거린다. 반면 주관적인 신념은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그래서 때로는 위대한 경지와 참혹한 불행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한 인간으로부터 이 양자를 동시에 구현할 수 없는 것일까?

 

인류는 수백만 년 동안 자기보다 작은 동물을 사냥하고 식물을 채집했으며 대형 포식자들을 강탈해 왔다. 이렇게 지배해온 자신감은 너무도 빠른 먹이사슬의 정점에 뛰어올랐고 한 세기 안에 대륙정복과 식민지 지배를 모두 겪었다, 따라서 황제는 권력을 포장해 정의를 앞세워 온 반면 민중들은 도덕적인 것보다 인간적인 것, 이성 보다는 감정이 삶의 전경을 차지해 왔다.

 

역사의 심판에서 그리스보다 훨씬 거대하고 강력했던 제국들이 조산해 버린 사실은 신들의 황혼기에도 묵시록적인 예언으로 인류멸망을 속단했고, 평등 사회를 약속한 땅이 오직 자유만을 박탈했으며, 권력의 야합으로 날조된 죄를 뒤집어씌우는 정권 유지의 첨병들로 역사가 점철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도덕적 정의, 그리고 그의 제자 플라톤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힘의 지배원리에 의하여 실제 역사 속의 승자는 언제나 호모 저스티스(정의의 인간)로 위장된 절대권력의 강자였다.

 

인류 역사는 대부분 우리 안의 불의와 우리 밖의 정의로 불평등한 갈등 관계로 이루어졌다. 사냥과 먹거리를 위해 리좀(rhizome)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렇듯 인간의 욕망은 리좀적 확장에도 은밀함이 깃들면 욕망이 범람해지고 수평적 질서가 뒤틀린다.

 

유발 하라리호 문명의 배를 타고 진화의 바다를 항해한 오늘의 인류! 생명체가 그렇듯 정의에도 DNA가 있다. 따라서 호모사피엔스의 정의는 이성이 아니라 본성에서 작동되어야 한다.

 

 

21세기 민중의 꽃들은 가장 절박하고 심오한 삶의 근저를 깊이깊이 들여다보는 권력의 포로가 아닌 정의가 언제 피어날지 오늘도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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